본문 바로가기
나의글

이야기를 잃어버린 작가 - 사라진 단어들이 되돌아오는 시간

by 스노벨 2025. 5. 16.

이 산문은 글을 쓰는 사람의 정체성과 상실감을 표현한 습작입니다.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의 잔재와 기억과 상상을 다뤄보았습니다. 어떤 날은 단어가 사라진다. 쓰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쓸 수 없는 날들이 있다.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이야기는 아주 천천히, 돌아오는 법을 배운다. 이 글은 사라진 이야기 속에서 다시 걸어 나오는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 사노벨의 이야기를 잃어버린작가

 

 

 

이야기를 잃어버린 작가

이야기가 사라진 건 어느 날 갑자기였다. 문장이 끊기고, 단어들이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빈 화면만 바라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커피는 식었고, 창밖의 바람은 더 이상 이야기의 시작이 되어주지 않았다.

작가는 방 안에 홀로 앉아, 자판 위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눈을 감으면 언젠가 쓴 이야기의 일부가 떠올랐다. 무너진 다리 위를 걷던 아이, 뜨거운 차 한 잔으로 서로를 용서했던 사람들. 그러나 그 장면들은 너무 멀리 있었다.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꿈처럼.

며칠, 아니 어쩌면 몇 주가 지났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글을 쓰지 않았고,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단 한 사람도, 왜 쓰지 않느냐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건 더 깊은 침묵을 남겼다.

그러던 어느 오후, 작가는 서랍 속에서 오래된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낡은 가죽 커버, 모서리가 헤진 가장자리를 따라 먼지가 묻어 있었다. 열어보니, 거기엔 자신이 쓴 기억이 없는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당신은 지금도 이야기 속에 있어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말들이 있어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춘 것뿐이에요.”

문장은 단정했고, 다정했으며, 무엇보다 익숙했다. 

그 글씨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작가는 책상에 앉아 그 문장들을 따라 써 내려갔다. 

한 자 한 자, 마치 그 문장을 통과하지 않고는 자신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이 가장 조용할 때, 가장 잘 들립니다.”

그날 밤, 작가는 처음으로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예전과 달랐다. 그건 텅 빈 침묵이 아니라, 무언가가 곧 피어날 듯한 침묵이었다. 비가 내리기 전, 바람이 멈추는 순간처럼.

그는 아직 단어를 붙잡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쓰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수첩 속 낯선 문장들처럼, 이야기들은 언제나 가장 필요한 순간에 돌아온다. 다만, 우리는 가끔 그 이야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작가는 이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남고 있을지 모른다.

작가는 다시 글을 쓰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책상은 어릴 적 자신이 쓰던 나무 책상이었고, 노트북 대신 공책과 연필이 놓여 있었다. 그는 처음엔 아무것도 쓰지 못했지만, 연필 끝에서 점점 글자들이 피어났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야기였고, 동시에 자신의 것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손끝에 여운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어젯밤 열어둔 수첩을 다시 펼쳤다. 이제는 문장 하나하나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는 그것을 붙잡았다.

하루에 단 문장 하나라도 쓰기로 했다. 의미가 없어 보여도, 연결되지 않아 보여도.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그는 매일 짧은 문장을 한 줄씩 썼다.
“오늘은 손등에 햇살이 닿았다.”
“커피가 식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당의 나무가 작년보다 조금 자랐다.”
문장들은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감정이었다. 그리고 감정은 언제나 이야기보다 먼저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네의 오래된 서점, 벤치가 있는 공원, 혼자 자주 가던 찻집. 모든 장소가 예전과 같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스쳐 지나가던 순간들이, 지금은 천천히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수첩 마지막 페이지에 또 다른 문장을 발견했다. 처음 봤을 땐 없었던 문장이었다. 연필로 아주 작게, 종이 아래쪽에 적혀 있었다.

“당신이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가, 언젠가 누군가를 살게 할 거예요.”

그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말은 누가 남긴 것일까. 과거의 자신일까, 아니면 아직 만나지 못한 누군가일까. 문장 하나가 사람을 다시 쓰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믿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작가는 다시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완벽하지도, 빠르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단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야기를 잃은 줄 알았지만, 실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귀를 닫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야기는 여전히 그 안에 있었다. 고요한 침묵 속, 말하지 못한 마음들 속,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감정들 속에.

그는 이제 안다. 이야기를 쓰는 일은 잊지 않기 위해, 아니면 잃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천천히 꺼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그 이야기들도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을.


마무리
이야기는 늘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침묵할 때, 조용히 따라오고, 우리가 잊으려 할 때, 멀리서 기다린다. 그것은 쓰는 일이 아니라, 살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의 이야기도 누군가의 문장이 되어 누군가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작가:스노벨의 마음을 담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