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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글

우산을 건네던 날 -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by 스노벨 2025.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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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문은 조용한 행위로 전달되는 감정 그것이 남긴 여운에 대한 이야기를 쓴 습작입니다.
어떤 마음은 말보다 행동으로 전해진다. 아주 짧은 순간, 아무 말 없이 우산 하나를 건네던 날이 있다. 그날의 고요한 친절은, 오히려 많은 말보다 더 오래 남는다.

 

우산을 건네던 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의 삽화

 

 

우산을 건네던 날 

비가 오는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였다. 구름은 조용히 몰려왔고, 거리의 소리는 순식간에 젖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폈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날따라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정류장 지붕 아래에 섰다. 출근길, 바쁘지도 여유롭지도 않은 시간. 사람들이 무심하게 내 옆을 지나쳤고, 바닥에는 빗물이 모였다. 나는 발끝을 모으고 서 있었다. 어쩐지 오래 머무를 것 같은 비였다.

그때, 그가 다가왔다. 말없이 내 옆에 섰고, 나보다 키가 약간 컸다. 그의 우산은 큼직했고, 진회색이었다. 물방울이 모서리에서 똑똑 떨어졌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니, 나는 그를 알지 못했고,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었다. 그는 나보다 반 발 앞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깐 멈췄다. 아주 짧은 망설임이었고, 그 망설임 끝에 그는 조용히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우리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하나의 우산을 함께 쓰고 있었다.

걸음은 조심스러웠고, 거리는 낯설었다. 나는 그의 왼쪽 어깨에 묻은 빗방울을 힐끔 보았고, 그는 오른손에 힘을 줘 우산을 나보다 더 많이 기울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조용한 배려가, 말보다 더 깊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모퉁이를 한 번 돌았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그 역시 나의 목적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같은 방향으로, 같은 우산 아래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멈춰 섰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이 우산을 내게 건넸다.
“이제 그쪽이 가져가요.”

나는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는 웃지 않았지만, 미소가 묻어 있었다.
“이 근처에 살아요. 금방 들어갈 거예요.”

나는 우산을 받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비 속으로 걸어갔다.
우산 없이.

나는 그 우산을 들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산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내 마음은 이상하게 묵직했다. 그는 빠르게 사라지지 않았다. 천천히 걸었다. 등을 굽히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마치 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나는 그를 다시 본 적이 없다. 그 우산은 내 방 안에 접힌 채 놓여 있었다. 몇 번이고 돌려주려 했지만, 우리는 다시 마주치지 않았다. 사람은 그렇게 스쳐간다. 짧고도 강하게. 아무 말 없이.

그날의 우산은, 한 사람이 내게 해준 가장 조용한 친절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배려. 나는 그걸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우산을 꺼내 든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조용히 다가갈 수 있을까.
아무 말 없이, 우산 하나 건네줄 수 있을까.


마무리
우산 하나로 나눴던 거리는 짧았지만, 그날의 마음은 오래 남았다. 다시 마주치지 않아도 좋다. 그 조용한 배려는, 내 기억 속 가장 젖지 않은 순간으로 남아 있다.


작가:스노벨의 마음을 담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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