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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글

빈자리 – 할머니 없는 집에서 처음으로 잠든 밤

by 스노벨 2025. 5. 24.

작가 스노벨의 산문 습작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무 말 없이 생긴 ‘빈자리’ 앞에 멈춰 서게 됩니다.그 자리에 늘 있던 사람, 냄새, 소리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채우고 있었는지 알게 되죠.이 이야기는 병원으로 실려간 할머니를 기다리는,작은 손자의 아주 조용한 하루에 대한 기록입니다.

 

빈자리의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는 손자의 마음을 표현한 일러스트레이터



제목: 빈자리

 

현관문을 열었을 때, 바닥엔 마트 비닐봉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오전에 할머니가 들어오시려다 두고 간 거였다.
봉지 안엔 귤, 참기름, 바닥에 눌려버린 두부 한 모가 들어 있었다.
그걸 그대로 두고, 나는 신발을 벗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텔레비전도 꺼져 있었고, 밥솥은 뚜껑을 열고 있었다.
그릇은 싱크대에 말라붙은 채 쌓여 있었고, 전기장판은 아직 따뜻했다.
병원에 실려 간 지는 다섯 시간쯤 됐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현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식탁에 항상 놓여 있던 할머니의 물컵.
그 옆에 눌린 신문지와 반쯤 먹다 남긴 약봉지.
평소라면 치웠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 자리가 사라질까 봐.

문득 냉장고가 소리를 냈다.
그 웅웅거리는 소리가 거실 전체를 채웠다.
나는 부엌에 가서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데,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목이 마른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몸이 무거웠다.

할머니는 내가 다섯 살 무렵부터 키웠다.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았고, 학교를 다녀오면 현관 앞에서 기다려 주던 사람.
혼자 밥을 먹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고, 혼자 자는 법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잠이 왔다.

오늘 밤은 혼자 자야 했다.

내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불빛 아래, 아직 다 펴지 못한 숙제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놓인 할머니의 손 편지.
“된장국 끓여놨다. 물 말아서 먹고, 이불 펴고 자라.”

나는 그 글씨를 가만히 따라 읽었다.
글자 사이사이에 할머니의 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냄비를 열어봤다.
정말로 된장국이 있었다.
고춧가루가 동동 떠 있고, 두부는 가장자리로 몰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데우고, 밥을 말았다.
식탁에 앉아 한 숟갈 떠먹었다.
짠 맛보다, 먼저 눈물이 올라왔다.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불을 끄고, 이불을 펴고, 누웠다.
천장을 보며 숨을 고르다가,
이불을 조금 더 얼굴 위로 끌어올렸다.

이불 밖엔 공기가 차가웠다.
그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할머니가 없는 이 집이, 이제 얼마나 오래 비어 있게 될까.

그날 밤,
나는 혼자 잠들었다.
처음으로.

 


사람은 떠났지만, 사람의 자리는 남습니다.
식탁 위의 물컵, 데워진 된장국, 조용한 거실 공기 속에 그 존재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지요.
이 글은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 가지고 있는 ‘비어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은 자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자리를 오늘도 우리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작가: 스노벨의 마음을 담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