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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글

나는 광안리 바닷가를 걷고 있다 - 내안의 기억

by 스노벨 2025. 5. 10.

이산문은 마음이 힘들때 광안리를 걸으며 생각했던것을 기록한 습작입니다.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풍경이, 오래된 기억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겨울 끝의 바다, 광안리에서 나는 그 조용한 목소리를 들었다.

 

해 질 무렵 광안리 해변을 흰옷과 흰모자를 쓴 여성이 걷고 있으며, 배경에는 광안대교가 보인다


나는 광안리 바닷가를 걷고 있다.


겨울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늦은 봄의 오후다. 해는 서서히 수평선 뒤로 사라지고, 하늘은 옅은 보랏빛으로 물든다. 여름의 활기찬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은 없지만, 오직 나의 발자국 소리와 바람만이 모래 위에 남는다.

부산에서 오래 살아 왔지만, 혼자 광안리를 걷는 것은 처음이다. 내게 부산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였고, 광안리는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 광안리는 내가 알던 곳과 전혀 다르다. 상점들은 조용히 불을 밝히고 있지만 손님들은 보이지 않는다. 카페 창가에는 사람들이 놓고 간 빈 잔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모래는 발밑에서 부드럽고 차갑게 흐트러진다. 광안대교의 희미한 조명이 먼 바다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바람은 차갑지만 견딜 만하다. 나는 주머니 속에 두 손을 넣고 조금씩 걷는다. 바닷가를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가장 솔직한 부분을 마주하는 일과 닮았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과거의 기억처럼 끊임없이 내 발치까지 다가온다.

몇 년 전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이 바닷가를 걸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은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의 웃음소리와 어깨에 걸친 스웨터의 색깔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아마 그때는 여름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고, 우리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손을 잡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파도와 모래의 경계를 바라본다. 조개껍질 하나 없는 깔끔한 모래사장 위로 물이 미끄러져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난다. 이 풍경이 내 마음과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가왔다가 다시 떠나는 기억들, 붙잡으려 하면 더욱 빠르게 흩어지는 순간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흐려지고, 사람은 변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가끔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진다. 바다는 그 모든 감정들을 알아챈 듯 말없이 그저 반복해서 파도를 보내줄 뿐이다. 파도가 내 발끝을 적실 듯 다가왔다가 천천히 돌아선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내쉰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광안리를 떠올리면 화려한 불꽃 축제와 광안대교의 아름다운 야경을 생각한다. 그러나 나에게 광안리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곳은 나의 잃어버린 기억과 찾을 수 없는 감정들이 머무는 곳이다. 나는 그 기억을 찾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억들을 바닷가에 두고 떠나기 위해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어둠이 바다 위에 내린다. 등 뒤의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나는 천천히 모래사장을 벗어난다. 신발에 붙은 모래를 털어내며 걸음을 옮기자, 근처 상점에서 음악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그 노래를 들으며 잠시 멈춰 서 있는 동안, 나는 문득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처음부터 나 자신을 기다렸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광안리를 찾은 이유는 결국 이 단순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바다는 늘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돌아와 그 앞에 서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까보다 더 천천히 걷는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이야기를 이제는 조금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나는 다시 광안리를 찾겠지만, 그때는 다른 마음으로 오게 될 것이다. 바다는 그대로겠지만, 나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이제 밤공기가 차가워진다. 옷깃을 여미고 길을 돌아 나오자, 버스 한 대가 정류장으로 천천히 들어온다. 나는 마지막으로 바다를 한 번 더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다.


마무리
그리고 나는 안다. 어떤 감정들은 말하지 않아야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땐 나를 조금 더 잘 이해한 채로 이 바다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스노벨의 마음을 담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