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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글

바람과 벽지 사이

by 스노벨 2025.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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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문은 마음속에 문득문득 스며들었던 감정이 하루에도 몇번씩 교차하던 순간 삶의 고뇌를 점차 잊으려고 발버둥 치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나이가 쉰이 되어 거울을 보고 있는 나자신의 모습 바람과 벽지 사이 에서

 

바람과 벽지 사이

 

그날 아침, 나는 거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창가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는 햇볕이 들었다.

내 얼굴엔 아버지의 눈매가 보였고,
입가에는 어머니가 젊었을 때 지녔던 쓸쓸함이 얹혀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피부는 차가웠고,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주방에서는 커피가 끓고 있었고,
벽지엔 지난 겨울 붙인 메모지가 아직도 붙어 있었다.
“다음엔 천천히 말할 것.”

내가 쉰 살이라는 사실은 종종 잊힌다.
그러다 불쑥 어떤 기억이 밀려온다.
어릴 적 심었던 감나무 아래 앉아 있던 여름의 오후,
혼자 남겨진 운동장,
어머니가 처음 내 손을 놓던 날.

나는 바쁘게 살아왔다.
무언가를 증명하려고 애썼다.
이제는 조금 덜 애쓴다.
대신 창밖을 더 오래 바라본다.
말을 줄이고, 대답보단 듣기를 택한다.

요즘은, 무언가를 가지려는 마음보다
무언가를 놓아주는 일이 더 어렵다.

문득, 전화번호부를 정리하다
오래전 이름 하나에 손이 멈춘다.
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물어볼 수는 없고, 다만 조용히 이름을 한 번 더 읽는다.

나는 이제야 내가 누구인지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한때의 실패들과, 몇 번의 용기,
그리고 어긋난 타이밍 속에서 자라났다.

어떤 날은 산책 중에,
이름 모를 들꽃 앞에 멈춘다.
그 꽃은 아무 말 없이 피어 있고,
나는 그 앞에서 왠지 조용해진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바람 부는 소리를 좋아했다.
그건 어쩌면, 세상이 나를 부드럽게 밀어내는 방식 같았다.
쉰 살의 나는, 그런 바람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가만히, 그 안에 선다.
움직이지 않고, 바람을 듣는다.

밤이 되면, 오래된 책장을 넘긴다.
책 속의 사람들은 여전히 거기 있다.
그들도 나처럼,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나는 아침마다 물을 데우고,
천천히 마신다.
어떤 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날들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내 안에 만들어준다.

삶은 여전히 미완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모서리가 남아 있고, 여백이 많다는 것은
아직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이제 하루가 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저, 이 하루가 조용히 내 곁에 앉아 있다 가기를 바랄 뿐이다.

 

 

반백이 되어서 조차도 아직 삶을 모른다.

세월은 총알보다 빠르고 내곁에는 아무도 없지만, 나는 더이상 과거에 살지 않으려고 한다. 

 

작가: 스노벨의 마음을 담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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